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공화국 (문단 편집) === 멸망 이후 ===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 비록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통일시키기는 했지만 정작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남부 통치에서 고전을 거듭했다. 농촌의 사회주의화 개조 작업은 자영농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남부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새로히 협동농장에서 일하게 된 농민들은 저임금에 대한 불만으로 태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산성은 오히려 이전보다 크게 떨어졌다. 또한 협동농장화가 완료된 북부 농촌과 사회주의 개조가 지지부진한 남부 농촌의 공존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태풍이 연속적으로 들이 닥치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데다가 협동농장화되지 않은 자영농들의 농산물은 암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공무원들조차 배급이나 정부공급가가 아닌 암시장에 의존해 식량을 수급해야 했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이러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물가조정조치 및 신 화폐 발행을 단행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별 효력을 얻지 못한채 물가상승률만 높여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런 물가안정조치들의 1차 목표는 체제 유지의 근간인 공무원들이 국가 월급만 가지고 국정가격으로 식량을 수급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러다보니 화폐개혁을 하면서도 시장가를 인정하지 않고 국정가격은 계속 묶어두는 모순적인 행동이 이어졌고 당연히 현물은 국가수매를 외면하고 죄다 암시장으로 흘러가면서 시장가만 높아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 다른 국가로 배를 타고 이민가는 [[보트피플]]이 더욱 성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부인들은 [[호찌민 시|사이공]] 등의 도시에서 이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해가면서 암시장을 비롯한 시장경제 활동을 이어나가며 [[베트남]] 정부가 꿈꿨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교란시켰다. 이러한 경제운용의 난맥상과 통일 후 장기간 이어져온 경기침체를 극복하려는 베트남 공산당 내 개혁파들의 노력이 1980년대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쳐 결국 [[도이머이]]로 불리는 대대적인 시장화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런 흐름 때문에 일부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해외 거주 남베트남 이주자들이 현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경제 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책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다시 수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만, 북부 출신들도 1954년 이전에는 자본주의 밑에서 살았으니 그것이 크게 낯설지 않았다. 지금도 구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지역보다 구 남베트남 지역이 경제적으로도 훨씬 부유해서, GDP도 옛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찌민 시|호치민]](사이공)이 북부의 수도 [[하노이]]보다 두 배나 높다. '''정작 분단 시기에는 남베트남이 다소 앞서다가 얼마 가지 않아 북베트남과 동일한 수준이 되었음을 감안하면 격세지감.''' 또한 이쪽 지역에는 해외로 도망간 남베트남인들의 자손들이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이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비슷하게 중국의 공산화 이전이나 개혁개방 후에 [[양쯔강]] 이남 지역이 이북 지역보다 부유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통적으로도 온난 습윤한 기후와 풍부한 수자원 덕에 벼농사에 유리하다. 해상 패권에 근거한 서구 열강들의 경제적 진출 뿐만 아니라, [[홍콩인]]과 [[대만인]] 기업인들도 [[푸젠성]], [[광둥성]] 등 홍콩 및 대만과 문화가 비슷한 지역에 우선 투자함으로써 경제발전이 더 빨리 이루어져 북부 지역보다 먼저 자본주의화와 대도시화가 이루어졌다. 베트남의 경우 유연성이 부족한 사회주의 통제경제하에 북부 사람들이 더 오래 있었던 후유증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